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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시간, 생생 영어 공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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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2 12:10

세계 최초로 「Kiss」장면을 찍은 영화배우는 누구일까요

 

여주인공이 무척 화가 난 모양이다. 침 튀겨가며 손가락질 해대며 마구 화를 내고 있다. 남자 주인공도 무언가 한 마디 하려다가 가만히 여자 주인공의 입술만 바라본다.

갑자기 남자 주인공이 과격하게 여자 주인공을 끌어 안으며 마구 거친 말을 내 뱉고 있는 여자 주인공의 입술을 눌러 버린다. 끽소리도 못 하도록.

이 때 카메라는 휘둥그래진 여자 주인공의 눈을 클로즈업했다가 곧 주인공들의 입술을 중심에 잡아 360도 회전을 시작한다.

 

집안 식구가 모였다 하면 밥상머리에 앉고, 헤어질까 말까 고민할 때 포장마차에서 안주 없이 소주를 몇 병 비우는 장면처럼 이런 장면도 요즘 드라마를 볼 때마다 빼 놓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상사처럼 보고 있어 아무 감흥도 일지 않지만 이런 장면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뽀뽀에도 세계 최초의 뽀뽀가 당연히 있겠죠.

 

알아보니 세계 최초로 뽀뽀하는 장면을 찍은 영화 주인공이 제가 살고 있는 캐나다 출신 여성이라고 합니다.

그 분의 이름은 May Irwin’. 어라? 샐러드 위에 뿌리는 드레싱 중 천섬(Thousand Island) 드레싱을 말할 때 나오는 바로 그 양반? 토론토에 사는 저희 가족이 여름이면 자주 가는 ‘Thousand Island’. 그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이 바로 세계에서 최초로 영화 속에서 뽀뽀하는 장면을 찍은 사람입니다.

 

천부적 배우, May Irwin (1862-1938)

 

천성이 유쾌 발랄한 여성이었답니다. 원래부터 당대 유명한 코메디언, 배우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더군요. 연극 배우이자 가수였고 당대 유명한 보드빌(Vaudeville) 연기자였습니다. 보드빌(Vaudeville)이란 19세기-20세기초까지 유행하던 일종의 음악극이라고 합니다. 연극에 음악, 노래, 댄스까지 곁들인 형태로 공연했다니 현대 뮤지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찌기 연극의 중심지라고 불리우던 브로드웨이에서 코메디극, 음악극, 정극을 넘나드는 다양한 장르를 설렵하면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특이하게도 미망인 역할을 주로 많이 맡았다고 합니다.

 

당시 유행하던 뮤지컬 연극 중간 중간에 ‘May Irwin’이 부르는 노래가 삽입됐었는데 이게 아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2010년 현재 ‘May Irwin’의 연극을 직접 봤던 사람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그냥 이 정도로 끝났으면 아마 오늘날 May Irwin이라는 캐나다 여배우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May Irwin을 기억하는 것은 단 한 편의 영화 때문입니다. 아직 영화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1895, 그녀는 세계 최초로 「Kiss」 장면을 연기해 당시 관객들을 경악시켰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도 바로 「KISS」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연극을 시작하기까지

 

May Irwin 1862년 토론토 동쪽 ‘Whitby’ 태생입니다. ‘Whitby’는 한국 유학생들도 많이들 찾는 동네입니다. 토론토에서 가깝고 유명한 사립여학교가 있기 때문이지요. 하여튼

 

13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린 나이에 소녀 가장이 되면서 가정형편은 어려웠지만 연극을 좋아하던 어머니를 닮아 어릴 때부터 끼가 살아 있던 May는 장사를 하는 대신에 뉴욕주 버팔로에 있던 Adelphi Variety Theatre에서 여동생 Flora와 함께 연극 공연에 단역을 맡아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곧 공연 기획자 Tony Pastor의 눈에 띄어 1877년에서 1883년까지 뉴욕시티에서 그의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돼 공연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Metroplotan 극장에 나오더니 곧 Pastor가 직접 운영하는 극장에도 출연하게 되었죠. 이 극장은 뉴욕의 유명한 음악극 공연장이었습니다. 이 후 그녀는 「The Pie-rats of Penn Yann」과 「All of it」이라는 코메디 연극 두편으로 출세했습니다.

 

1883년부터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Toole’s Theatre라는 극장에서 몇 년 동안 공연하면서 유럽까지 명성을 알렸습니다. 1891-92년에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 와 코메디를 공연하다가 1893년에는 오스카 와일드나 세익스피어 등 정극을 주로 공연했다고 합니다.

 

세계 최초의 「Kiss」장면을 찍다

 

역사에 May Irwin을 남기게 된 결정적 계기는 1895년에 다가 왔습니다. 그해 브로드웨이 연극가에는 May Irwin의 연극 「The Widow Jones」가 화제거리였다고 합니다. 이 연극에서 May Irwin은 송사에 휘말려 곤란을 겪다가 소송인을 피하려 멀쩡한 남편이 죽은 것으로 가장하고 미망인 흉내를 내던 젊은 여주인공 Beatrice Byke 역을 맡아 열연했습니다. 나중에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발각나 관객들을 웃겼다는 연극입니다. The Bully Song」이라는 노래도 불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극 장면 도중에 상대 배우와 「Kiss」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망측하다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이 장면을 보기 위해 매일 밤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요즈음의 성인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 중에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 「활동사진」 영화를 막 발명했던 참이었죠. 아시다시피 토마스 에디슨은 발명만 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발명을 하고 나면 그 것으로 큰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사람이었죠.

 

자신이 발명한 영화를 세상에 널리 알릴 방법을 찾던 토마스 에디슨 머리 위로 자신이 발명했던 전구가 반짝 반짝 켜졌습니다.

 

『그래! Kiss」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찍어 보자!!!

 

지금같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보수적인 당시 분위기에서 부부도 아닌 남녀가 일반 대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키스하는 것은 일종의 「포르노그래피」였을 겁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바로 May Irwin과 상대역 John C. Rice를 불러 카메라 앞에 세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토마스 에디슨이 제작(감독은 아닙니다)한 최초의 상업적 활동사진 「The Kiss」가 탄생되었고 비록 카메라 앞에서의 연극이었지만 Irwin Rice는 이 장면 하나로 최초로 영화 속에서 「Kiss」를 한 커플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Kiss’ 장면이 나오는 세계 최초의 영화가 됐죠.

 

The Kiss

 

요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영화 속 Kiss 장면을 찍은 필름 스트립

토마스 에디슨이 설립한 영화사 에디슨 프로덕션이 1896년 찍은 47초짜리 최초의 상업용 단막 영화 중 하나입니다. 영화의 본 줄거리는 May Irwin이 출연한 연극 「The Widow Jones」였는데 워낙 플레잉 타임이 짧아 연극 줄거리를 다 보여주지 못 하고 가장 센세이셔녈했던 부분인 ‘May Irwin’‘John Rice’라는 남성배우간의 「KISS」 장면을 되풀이 상영해 많은 논란 거리가 됐습니다.

 

영화는 찍었으니 이제 돈 벌려면 홍보를 해야죠? 에디슨은 이렇게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그들은 키스할 준비가 됐다, 그리고 키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키스하고 키스하고 또 키스를 나눴다. 매 시간마다 집이 무너지도록 키스를 나눴다』

 

광고문구만 봐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Kiss」영화를 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보수적인 당시 정서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가는 일이었으니까요. 급기야 영화 상영 중에 경찰까지 달려 왔습니다.

 

어떤 성직자는 이 영화를 가리켜 「돼지우리속에서 읊어대는 서정시」라고 악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게 바로 세계 최초의 영화 속 Kiss 장면. 눈을 지긋이 감고 47초 동안에 입을 세번 맞췄습니다. 그게 영화 줄거리입니다. 콧수염이나 좀 깍고 찍지...

또한 Herbert Stone이라는 비평가는 『키스하는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았고 지겹도록 오래 서로의 입술을 덮으며 질질 끄는 장면은 실제로 봐도 역겨울텐데 무척 큰 비율로 확대해서 세번씩이나 반복해 보여주니 세상에 이렇게 역겨운 일이 어디에 있나』고 화를 내기도 했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남 부끄럽게도 부부도 아닌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 준다는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널리 퍼지면서 영화관은 매일 인산인해가 됐다고 합니다.

 

캐나다에서는 1896 7 21일 오타와(캐나다 연방수도입니다)의 공원 한 쪽에서 상영됐습니다. 이 영화는 당시 캐나다에서 상당히 큰 인기를 끌며 오래 상영되고 있었는데 이보다 한 달 전인 6 27일에는 몬트리올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또 다른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비평가는 이 영화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기가 높아져 스타덤에 오른 May Irwin은 그래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금발머리에 동그랗고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전과 같이 푸른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당연히 흑백영화였습니다. 푸른눈은 흑백으로 보였을 겁니다. 하여튼 그는 금발에 푸른눈이라고 마치 컬러 영화를 본 듯이 작문을 했습니다.

 

Irwin은 뒤를 이어 많은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예를 들어 1896년 「Courted into Court」라는 영화에서는 『유머감각이 뛰어난 금발머리 여자』로 묘사됐는데 이는 금발머리 여자는 멍청하다는 세간의 뒷소문에서 나온 말로 그만큼 May Irwin은 금발 여성이면서도 똑똑해 보였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1922년 음악극 「49ers」에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브로드웨이에서의 오랜 배우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키스신은?

기왕 말 나온 김에 우리 나라 영화 최초의 키스신은 언제 누가 무슨 영화에서였는지도 궁금해 찾아 보았더니...1954년 한형모 감독이라는 분이 만든 '운명의 손'이라는 영화에서였다고 하는구요. 흠...어떤 영화였을까요? 여배우(윤인자)가 유부녀라서 난리가 났었다는데...

 

Thousand island Dressing」과 May Irwin

 

이 분이 바로 '메이 어윈'. 몸매가 좀 항아리를 닮았습니다. 당시에는 예쁜 몸매였을까요?

이 사람은 최초의 「키스」장면으로 눈을 즐겁게 해 준 것 이외에 입에도 즐거움을 준 사람입니다. 그녀는 여름이 되면 세인트로렌스강 천섬(Thousand Islands)-캐나다동부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지역에 섬을 하나 사 휴가를 보내곤 했었습니다. Kiss 등을 찍어 돈도 잘 벌었지만 돈 관리를 잘하고 투자도 잘 해서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덕분입니다.

 

May Irwin은 음식을 잘 하기로도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당연히 관심도 많았겠죠.

 

당시 천섬 근처 뉴욕주 Clayton에는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George Sophia LaLonde Jr.라는 부부 낚시 가이드가 있었는데 이들 부부가 바로 원조 천섬드레싱을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드레싱 요리법을 배운  Irwin은 이 드레싱을 조금 고쳐서 「천섬드레싱, Thousand Island Dressing」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녀는 천섬에서 뉴욕 아스토리아호텔 사장 George C. Boldt에 이 드레싱을 대접했는데 이 맛에 반한 Boldt 사장이 호텔 요리사 Oscar Tschirky를 불러 호텔 식당에 내 놓도록 했습니다. 그 덕분에 요리사 Oscar가 오늘 날까지 「천섬드레싱」 개발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죠.

 

이 외에 코믹한 노래 몇 곡을 Victor 레코드사에서 취입했는데 이 중 몇 곡은 캐나다 연방 정부 고문서기록소에서 직접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아직 못 들어봤습니다만

 

     2년전에 캐나다 여성이야기시리즈를 쓰려고 하다가 몇 편 못 쓰고 중지한 바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보니 여성 위인들의 이야기가 너무 미국에 치우쳐 있어 아쉬운 나머지 캐나다의 여성 위인 이야기를 쓰고자 했습니다. 아직 제 블로그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런 이유로 기록한 글이 약 25편 정도 됩니다. 앞으로 시간되는대로 하나 하나 나눠볼까 합니다. 한국의 어린이, 특히 딸 키우는 부모님들에게는 아마도 별로 접해보지 못 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내심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나누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기왕 여기까지 오셨다면 아래 추천도 한 방 꾹 질러 놓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래야 다른 분들도 함께 나눠 볼 기회가 넓어지겠죠?

 

아래 글도 함께 보시구요.


♡ 캐나다의 딸들 (3) 아름다운 여성 Elizabeth Arden ♡
☆ 캐나다 최초의 여성 우주인 Dr. Roberta Bondar, 그리고 대한민국의 딸, 이소연씨 ☆

캐나다의 딸들 (1) The Famous Five  

 

파랑새 가족의 캐나다 이야기
http://canadastory.tistory.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핑크벨

2008/05/13 14:30
♡ 캐나다의 딸들 (3)  아름다운 여성 Elizabeth Arden ♡


♡ 지구의 반은 여성입니다. 엄마도 여성이고 내 딸도 여성입니다.

저 역시 딸을 키우고 있기에 내 딸이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저희 가족이 살고 있는 이 곳 캐나다의 딸들은 어떻게 살아 왔는지, 그들에게서 내 딸이 배울 점은 없는지 알아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글은 "캐나다의 딸들"이라는 제목을 달아, 안 보면 궁금하고 잊을 만 하면 찾아 오는 '작가 맘대로....연속극'으로 기고할 예정입니다.


 

♪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치 요즈음 안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버린 성형 열풍이나 얼짱, 몸짱 등의 신조어가 상징하는 외모 가꾸기 풍조를 그 예전에 어떻게 아시고 미리 비꼬듯이 부른 남진씨의 흘러간 옛 노래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봅시다. 사람을 처음 보자 마자 마음을 읽기는 어려우나, 겉 모습에서 느끼는 호감이라는 것은 사실 무시하지 못 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직도 가끔 입가에서 흘러 나오는 흘러 간 유행가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마음이 고와야 예쁜 여자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잘 알고는 있지만 첫 인상을 좌우하는 외모를 가꾸는 일 역시 그에 못지 않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이라고 하지만 자신을 가꾸고 싶어 하는 것은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동물이나 식물도 나름대로 자신을 가꾸는 본능을 지니고 있으니,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구 상의 모든 창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소위 좀 비싼 화장품이라고 하는 제품 중 Elizabeth Arden이 있지요. 오늘은 이 화장품을 개발한 사람, Elizabeth Arden에 대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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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izabeth Arden

Elizabeth Arden(1878, Woodbridge, Ontario ~ 1966, New York City, NY)의 어릴 때 이름이 Florence Nightingale Graham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녀의 부모님은 아마도 자신들의 딸이 간호사로서 성공하기를 몹시도 바랬나 봅니다.

(
이 분이 태어난, Woodbridge는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무척 가까운 곳인데, 조금 오래된 나무 많고 물 맑고 말 그대로 예전에는 나무다리가 있던, 살기 좋은 동네입니다.)

 

이 분은 이름에서 부여된 자신의 운명을 따라 필자가 살고 있는 이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 일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간호사로 근무할 때 그 녀는 주로 화상 입은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 덕분에 사람의 외모가 그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하게 되었고, 화상이 아물어 진 후에도 흉하게 변한 얼굴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되는 환자들을 위로하다가, 사람의 외모에 자신감을 불어 넣는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녀는 화상을 치료하는 크림이나 피부 연고 등을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미용 크림이나 로션 등으로 용도를 넓힐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 녀의 노력이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되자, 본격적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뷰티 산업에 진출할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플로렌스는 24살이 되던 해 뉴욕의 한 제약회사에서 회계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부엌에서 스킨 크림을 만들기 시작했답니다.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제품을 만들어 가면서 어떤 것은 썩은 달걀 같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등 초기에는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고, 또한 흔히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이 쓸 데 없는 일을 벌이지 말고 조용히 시집이나 가라는 소리도 여러 번 들으면서도 그 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화장품 개발을 포기하기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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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izabeth Arden – 뉴욕에서


엄청난 노력의 결과 1910년에 드디어 플로렌스는 모든 명품이 모이는 뉴욕 5번가에 빨간 문과 빨간 카펫을 깐 자신의 매장 ‘Red Door’를 내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때 플로렌스는 스스로 자신의 제품 브랜드 명을 Elizabeth Arden이라고 지었는데 자신의 파트너이자 화장품 제작 기술을 배운 Elizabeth Hubbard라는 사람의 이름과 유명한 Tennyson의 시, “Enoch Arden”에서 따 왔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이 브랜드가 결국 자신의 이름으로까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플로렌스가 자신의 화장품을 개발한 1910년 그 당시만 해도 화장이라는 것은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갈 때나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그 녀의 업적이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고루하게 비쳐지는 화장품에 대한 인식을 대중화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과 일반 여성들도 무대 위에 선 아름다운 배우들처럼 가꾸고 싶다는 속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 보여 준 계기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Elizabeth Arden의 화장품 사업은 기대 이상으로 잘 되었고 화장품을 사려는 여성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이에 힘을 받아, 연구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 1912년에는 프랑스에서 얼굴 마사지 기법을 연수 받아 이를 색채 화장법에 응용하거나, 북미에 현대적인 눈 화장법을 최초로 도입하는 등의 그 당시 참신하고 신선하게 보인 그 녀의 화장법은 곧 뉴욕을 넘어 유럽 등의 여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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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izabeth Arden – Golden Poppy

 

 

1920년대를 거쳐 1930년대까지 헬레나 루빈스타인과 도로시 그레이 등과 경쟁을 하면서 사세를 넓혀 나간 Elizabeth Arden, “지구 상의 모든 구석 구석마다 알려져 있는 세 가지 미국 이름을 든다면 Singer 재봉틀, Coca Cola, 그리고 나 Elizabeth Arden 이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자신감을 당당하게 펼쳐 보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사회 활동보다는 전업 주부 생활을 주로 하던 여성들이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하여 간호사로 전쟁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녀는 군복에 어울리는 톤의 립스틱을 개발하는 등 사회 활동을 시작한 여성들에게 맞춘 제품을 개발하여 사회적 분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였습니다.

 

Elizabeth Arden은 화장품 사업만 파고 든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S라인, 건강 미인이라는 말이 화두에 오르듯이 그 녀 역시 건강이 아름다움의 기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초로 음악에 맞춰 즐겁게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음반을 만들었고, 요가 프로그램을 자신의 매장에 도입하여 건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토탈 뷰티 사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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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izabeth Arden - 1956년 5월 Time지 표지

 

이런 이야기는 지금 생각하면 뭐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콜롬버스의 달걀이 알고 보면 어이 없듯이, 그 당시 이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대 상황에 앞서가는 마케팅 전략.

새 시대의 새 수요를 창출하는 기획력.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항상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고객의 니즈를 생각하면서 한 발 앞서 조금씩이라도 차별화된 제품을 선보인 Elizabeth Arden의 화장품이 오늘 날 명품으로 대접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Elizabeth Arden. 그 녀는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시대의 흐름을 적절하게 자신의 사업에 응용할 줄 아는 통찰력으로 자신의 꿈을 이룬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 보아………이 글은 저희 가족이 살고 있는 옆 동네 출신인 Elizabeth Arden에 대하여 쓰긴 했지만, Elizabeth Arden 화장품 회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쓴 글이라 (불행하게도) 화장품 하나 얻지 못 한 글입니다. 단지, 그 녀의 생애에서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배우고 느낄 점이 있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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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핑크벨

2008/04/01 12:49

☆ 캐나다 최초의 여성 우주인 Dr. Roberta Bondar,
그리고 대한민국의 딸, 이소연씨 ☆


 

☆ 우주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나요?

 

어릴 때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밤하늘을 올려 보면서 은하수도 찾고 별자리도 찾던 추억, 누구나 있을 겁니다.

(☆ 요즈음 아이들은 아마 은하수를 본 적이 없겠죠? 하긴 반딧불이도 보기 힘든 세상이니 말입니다.) 별자리를 찾으면서 저 별 다음에는 또 무슨 별이 있을까, 그리고 그 별 다음에는 또 무슨 별이……하면서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어 어지러워 하곤 했지요.

 

굳이 팽창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경계가 없는 공간이나 완벽하게 물질이 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우니, 당연히 우주 공간이란 어딘가 경계가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 경계 밖은 또 무엇인지……돌고 도는 생각에 지금도 밤 하늘을 보면 어지럽습니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1969년의 일이니 중년 이상들만 기억하겠지만, 어릴 때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내리는 모습이 중계되는 모습을 동네 전파사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흑백 TV로 보면서 정말 놀라와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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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에 착륙하는 Neil Armstong. 인터넷 여기 저기 퍼져있는 사진인데 어디서 퍼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 당시에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지만, 나중에 과학을 배우면서 지구에서 달로 우주선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정교한 일인지, 오늘날과 같이 컴퓨터가 제대로 발달하지도 않았던 그 시절에 무슨 깡으로 그런 모험을 감행했는지 새삼 깨닫고 더더욱 전율을 느꼈습니다.

 

(※ 아래 사이트에 가시면 그가 달에 착륙할 때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tarchild.gsfc.nasa.gov/docs/StarChild/whos_who_level2/armstrong.html
)

 

암스트롱 이후 거의 4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일부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우주 관광이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 되고 있다 하는데 거액의 돈을 단 몇 시간에 쏟아 부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우주는 그렇게 대단한 것일 겁니다.

 

☆ 우리 나라도 이제는,

 

며칠 후면 이소연씨가 달은 아니지만 하여튼 우주 공간에 첫 발을 디디겠군요.

 

우주 여행이라는 것, 일단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우주인 개인의 육체적 적응력만 따져 보아도 보통 사람은 쉽게 감당이 안 될 겁니다. 당연히 지구의 중력을 박차고 우주 공간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몸으로 받는 중력을 이겨야 하며 무중력 상태에서의 몸의 변화 등을 견뎌야 하는 훈련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데 이 훈련 과정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겠지요. 아이들 놀이터에서도 원심력과 중력의 힘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정도 놀이 기구도 저 자신은 절대! 타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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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연씨. 보기에도 참 당차 보입니다.

그래서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우주인이 된다는 것 자체는 육체적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여성 우주인 이소연씨는 아마도 조혜련씨를 능가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캐나다 최초의 여성 우주인, Dr. Roberta Linn Bondar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우주인 이 소연씨에 대한 기사를 접하면서 문득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캐나다의 최초의 여성 우주인은 과연 어떤 분일까 하고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조사해 보니 캐나다의 우주인은 현재까지 총 9, 그 중 여성은 2명이더군요.)

 

우주 개발의 선도자인 미국에서는 이미 우주인들이 많이 나왔고 이 중 여성 우주인도 많이 배출되었죠. 우주인용 기저귀를 차고 연적을 찾아 장거리 운전을 한 정신 나간 사람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모국의 이소연씨를 생각하면서 캐나다에서 최초로 우주 비행을 한 여성 우주인 Roberta Linn Bondar 박사 (1945 ~ ; OntarioSault Ste. Marie 출신 토론토에서 북서쪽 약 700km)를 만나 우주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 물론 직접 만나 보는 기회는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은 인터넷과 우리 아이들의 책 속에서 만나 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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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최초의 여성 우주인, 그 녀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퍼 왔습니다.

이 분도 역시 어릴 때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외계인과 최초로 만나는 꿈을 꾸어 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주도적으로 우주 탐험을 해 왔고 그런 만큼 자주 우주선이 발사되는 모습을 볼 수 있기에 이 곳 아이들이 유난히도 우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래서 어릴 때부터 로켓 모형도 만들고 NASA의 포스터 등을 모았다는데 아버지는 이런 딸의 꿈을 위하여 grade 7 (1)때 집 지하실에 조그마한 실험실을 만들어 주어 매일같이 시험관과 현미경을 가지고 놀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하네요.

 

어릴 때 그 녀의 장래 희망은 의사, 과학자, 그리고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뭐 이 정도까지는 누구나 꿈 꿀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는 이런 것이 그냥 어린 시절의 꿈에 그치는 것이고 누구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이 분은 공부에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인 모양입니다. 토론토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Guelph 대학에서 농업과 동물학을 공부하고 Western Ontario 대학에서 병리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토론토 대학에서 신경생리학 박사, 맥마스터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Royal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of Canada(RCPSC)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 공부를 했다면 벌써 지치거나 대학에서 교수를 하던지 아니면 편하게 의사를 하겠죠.

 

그런데 이 사람은 도전 의식이 대단한 사람인가 봅니다. 이 정도 공부를 한 것도 어지간한 끈기와 도전 의식 없이는 힘든 일일 것 같은데, 일찌감치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 녀는 1984년 드디어 우주 비행사가 되기 위하여 4300명 이상의 경쟁을 뚫고 캐나다 항공우주국의 우주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NASA의 우주 비행사 훈련 과정을 훌륭하게 이수한 후 1992년에 드디어 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탑승하여 캐나다 최초의 여성 우주인으로서 우주 공간에서 세계 최초로 신경병리학 실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알츠하이머 병의 예방에 주목하고 있는 그녀는 지금은 실험실을 나와 자신의 최초의 우주 경험과 학습과 연구에서 얻은 수 많은 지식을 수 많은 책과 강연 등을 통하여 대중과 나누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TV에서 이 사람의 강의를 잠깐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사실 이 사람을 잘 몰라서 별 생각 없이 채널을 돌렸답니다.

 

“Space is a constantly changing environment that doesn't play by Earth rules. 우주란 지구의 법칙에 구애 받지 않고 계속하여 변화하는 환경입니다.”

 

이 분의 공식 홈페이지 첫 머리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 녀는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날 끊임없이 변화와 마주하는 사람들은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환경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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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에서 개발한 우주왕복선 로봇팔(Robot Manipulator). 우주공간에서 위성을 쏘아 올리거나 회수할 때 주로 사용. 온타리오사이언스센터 전시관 내 사진.


그 녀의 뒤를 이어 1999년에는 Julie Payette이 다시 디스커버리호를 타게 되었고 이 임무 중에 캐나다가 개발한 우주왕복선의 대형 로봇팔을 우주 궤도에서 조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러시아 우주정거장에 수동 조정 도킹에 성공하는 등 ISS 프로젝트에 참여한 최초의 캐나다 우주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소연씨도 우리 나라 우주선이 아닌 러시아의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갑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우주선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며칠 우주왕복선을 타고 돌아 온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그러나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며칠 우주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노력뿐만이 아니라 그 나라의 노력과 기반 과학 기술이 제대로 뒷받침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우주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죠. 인류의 불확실한 미래를 해결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도 있으며 개인이 우주 공간에서 행하는 며칠 동안의 연구가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Bondar 박사 같은 사람이 그토록 공부와 연구와 노력을 열심히 했다는 것은 마치 우리를 대표하여 그 힘든 일을 대신 해 주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모험은 개인의 영광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그저 고마운 일일 수 있을 겁니다.

 

과학 문명이 이제 더 이상 달에는 계수 나무도 없고 방아 찍는 토끼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밤 하늘의 달을 보면 그저 신비롭게만 느껴집니다.

 

자는 이 광활한 우주에 오로지 지구인만 똑똑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외계인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지구인의 독선과 무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친구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다행스럽게도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을 뿐.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외계인을 만나는 최초의 지구인이 되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였다는 Bondar 박사의 뒤를 이어 달을 넘어 화성, 목성까지 소풍 가서 외계인을 만나는 최초의 지구인이 우리들의 아들, 딸 중에서도 계속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우주인이 될 이소연씨에게……


지구 최초로 달을 밟은 미국의 Neil Armstrong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 것은 나 한 사람에게는 그저 작은 한 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아주 커다란 도약이 될 것이다.” 라고 말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우주로 나가는 대한민국의 딸, 이소연씨는 최초의 교신에서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남길까요?

 

무슨 이야기를 남기건, 앞으로 그 말을 더욱 더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한국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딸로서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여러 가지 연구에 도움을 많이 주시기 바랍니다. 무사 귀환 후 특히 제 딸 같은 꿈 많은 어린이들에게 신념을 가지고 노력을 하면 반드시 꿈이 실현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모쪼록 건강하게 잘 다녀 오십시오.


☆ 우리 나라 최초의 우주인이 될 뻔한 고산씨에게……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할 때가 있지만, 고산씨의 실수는 정말 치명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마음 고생이 무척 심했을 겁니다.

사람들은 아폴로11호의 Armstrong 다음으로 달에 내린 Edwin Eugene 'Buzz' Aldrin Jr.나 함께 갔지만 달을 빙빙 돌라 올 수 밖에 없었던 Michael Collins같은 분들의 노고는 쉽게 잊어 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Armstrong이 그렇게 큰 영광을 지구인에게 돌릴 수 있었겠지요.

짧은 기간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갔겠지만, 이제 속 상한 마음 다 잡고, Aldrin이나 Collins 같은 진정한 영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자료를 원하시면 http://www.robertabondar.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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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핑크벨

  1. Favicon of http://diarix.tistory.com BlogIcon 그리스인 마틴 2008/04/02 1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정말 방대하면서도 자세하게 설명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주셨네요.
    덕분에 좋은 정보와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Favicon of http://canadastory.tistory.com BlogIcon 핑크벨 2008/04/02 2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역시 마틴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런데 조금 궁금해서 그런데 여쭤 봐도 될런지... 글을 보면 전혀 그리스인 같지 않은데...왜 그리스인이신지, 그리스인 마틴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diarix.tistory.com BlogIcon 그리스인 마틴 2008/04/03 0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리스인 마틴이라는 닉네임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패러디한 것일 뿐입니다 ^^
      자유롭게 살다간 진정한 자유인이었던 조르바를 너무 좋아해서 앞에 그리스인을 붙인 것입니다.
      이제는 외계인 마틴 또는 우주인 마틴이라고 해야할까요?

  2. Favicon of http://zombi.co.kr BlogIcon 좀비 2008/04/05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소연씨가 조혜련씨를 능가할 거라는 말씀에 웃음 한번.. ^^
    제 글에 상세한 댓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008/01/13 18:23

캐나다의 딸들 (1) – ‘The Famous Five’

 
 

♡ 지구의 반은 여성입니다. 엄마도 여성이고 내 딸도 여성입니다.

저 역시 딸을 키우고 있기에 내 딸이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바라며 Canada의 딸들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배울 점은 없는지 함께 살펴 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공짜로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겠지만 오늘 날 우리가 이 정도로 살게 되는 것도 결국은 우리를 대신하여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먼저 해 주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중에는 지금 생각하기에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것이 당연시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 몇몇 용기 있는 사람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들이 많다.

 

Canada 연방 수도 OttawaParliament Hill에는 연방국회의사당이 있는데 의사당 본관의 오른편에는 5명의 여성 동상들이 있다. 가운데 여성은 손에 대자보 같은 것을 펼쳐 들고 있는데 이 동상은 1929“Person”남성(male)”여성(female)”이 포함된다는 판례를 이끌어낸 Emily Murphy 5인의 여성을 기념하여 세워진 Canada의 양성평등권을 상징하는 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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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방국회의사당 @ Parliament Hill, Ott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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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사당 오른쪽에 있는 "The Famous Five"의 동상


♡ “여성사람에 포함되지 않는다? ♡

 

오늘 날 Canada 여성들에게는 당연히 국민의 기본 권리가 모두 있고 이에 따라 의회에 진출하여 상원의원이 될 수 있는 자격 역시 있다. 당연하다.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니까. 그런데, 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사실은 원래부터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당연한 권리가 여성들에게도 있음을 일깨워 준 사람들이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The Famous Five이다.

 

“The Famous Five” 또는 “The Valiant five”라고 부르는 이 다섯 Canada의 선구자들은 1927년에 여성(women, female)도 법률적인 의미에서 공직에 선출될 자격이 있는 사람(qualified person)에 포함되는가?”라는 질문을 Canada 법원에 공식 제기하였다.

 

이 다섯 명의 선구자들은 Emily Murphy Henrietta Muir Edwards, Nelie McClung, Louise McKinney, Irene Parlby인데, 이 분들은 20 세기 초반 주로 Alberta주에서 여성의 최저 임금을 지키고 농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위하여 투쟁하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여성의 지위와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들로서,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이다.

 

이 중 Nellie McClung은 서부 Canada에서 여성들의 투표권을 얻기 위하여 투쟁한 사람인데, 이 분의 노력으로 1916년에 비로소 Alberta주나 Manitoba, Saskatchewan주의 여성들은 드디어 해당 주에서의 투표권을 인정받았다. 이 덕분에 다른 주들도 점차 이를 따르게 되어 1918년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여성들이 연방 투표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여성들이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성의 권익은 미미하여 공직에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1916년에 Emily MurphyCanada를 포함한 영연방국가에서 최초로 여성으로서 판사 임명을 받긴 하였으나 정작 법정에서는 여자에게는 법관이 될 자격이 없다면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이 무엇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여성에게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회가 여성 권익에 눈을 뜨게 되면서 참된 민주주의 사회로 한 걸음 다가가는 계기가 된 사건이 발생한다.


 

♡ “The Person’s Case” ♡

 

1867년에 제정된 영연방북미조례(British North America Act ; BNA)에 따르면 총독은 그 자격이 인정된 사람(qualified person)에게만 상원의원(Senator)으로 지명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당시까지 남성들만 상원의원으로 지명되어 왔을 뿐 여성에게는 눈짓도 주지 않았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이 조례에 있는 ‘qualified person’에는 female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되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여자란 그저 집안 일만 잘 하면 되는 것이니까.

 

이런 황당한 일에 맞서 당시 그나마 몇 안 되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고, 이에 결국 1927년 법무부에서 Canada 연방 대법원에 “BNA에 있는 용어 “qualified person”에 과연 “female”이 포함이 되는지 여부를 해석해 달라는 질의를 내게 된다.

 

그러나 5주 간에 걸친 대법원에서의 논쟁 끝에 여성(female)은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간(qualified person)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는 어이 없는 결론이 나왔다.

 

그 이유인 즉 해당 조례(BNA)를 제정할 당시인 1867년에는 여성의 정치 참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상원의원에 여성을 제청해야 할 필요도 전혀 없었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런 이유로 인해 해당 조례의 “qualified person”에는 여성이 배제된 개념으로 해석된다는 문구 그 자체의 해석에 지극히 보수적인 생각을 담아 답을 준 것이다.

언뜻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답변인데, 다시 생각해 보면, 법무부가 단지 1867년에 제정된 조례의 문구 해석을 요청하였을 뿐이니 대법원에서는 '그 문구는 이렇게 해석된다' 하고 답변이 그냥 그렇게 나온 것뿐이다. (※ 필자의 뱀 다리 같은 생각 : 여기서, 법관이 상황 인식을 제대로 하지 않고, 단지 문구 해석에만 매달린다면, 여러 사람들이 피곤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해서 판사들 보고 정치적인 해석을 해 달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저 언제 어디서나 가끔은 답답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일 뿐...)

 

그런데, 실질적인 문제는 그 고리타분한 골동품 조례 때문에 여성이 연방 상원의원으로 진출하는 것이 봉쇄되어 있고 이 조항의 보수적 해석 때문에 여성의 기타 공직 진출의 길도 막혀 있다는 것이었다.

 

Emily Murphy를 포함한 다섯 명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다시 힘을 모아 그 당시 Canada의 최고 법원인 영국 추밀원(The Judicial Committee of the Privy Councill of England)에 이 건을 제소하였고 1929년 10월 18 드디어 추밀원에서 모든 공공기관에서 여성(woman)을 제외시키는 행위는 야만스러운 행위임을 선언하게끔 되었다.

 

그 결과 모든 여성도 역시 법률적 의미에서도 동등한 조건을 갖춘 인간에 포함이 되면서 모든 공직에 나설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당시 영연방 국가에서 ‘The Judicial Committee of the Privy Councill’은 최고법원이었기 때문에 이 위원회의 결정은 곧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은 판례가 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를 따르게 되면서 여성의 권리 신장, 사회 참여와 정치 참여를 막을 논리가 없게 되면서 양성 평등을 향해 획기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판례를 The Persons Case라고 부른다.

 

이 중요한 판례를 이끌어 내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수 년 동안에 걸쳐 당시의 언론계와 법조인 등 각계 각층에 영향력이 있었지만 태생이 보수 성향이었던 남성들을 먼저 설득하여, 이제 더 이상 여성의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되겠다고 일깨워 냈고, 결국 그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이 다섯 분들이 이토록 중요한 판례를 이끌어 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넉 달 후 이 판례에 따라 Cairine Wilson이 최초로 여성 연방 상원의원이 되어 기쁨을 더 하였다.

 

이렇듯 이 Famous Five가 여성의 동등한 권리 쟁취와 민주사회의 발전에 공헌한 바는 무척 크기에 이 것을 기리기 위하여 Canada 정부는 양성평등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한 사람들에게 총독 명의로 Persons Case를 기리는 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을 하고 있다.



♡ “Who are The Famous Five?” ♡

 

아래 간단하게 다섯 분의 약력을 소개한다. Ottawa에 가면 국회의사당 오른쪽 옆의 동상을 찾아 보는 것도 좋겠다.

 

l        Emily Murphy (1868, ON ~ 1933, AB) Canada와 영연방국가 내 최초의 여성법관, Canada 여성 국가 위원회 부위원장.

 

l        Henrietta Muir Edwards (1849, PQ~ 1931, AB) 변호사 -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변호 활동, Victorian Order of Nurses(여성위원회) 조직

 

l        Louise McKinney (1868, ON ~ 1931, AB) Alberta주의 여성 투표권 쟁취, Alberta주 의회 최초의 피선출 여성의원(=영연방국가 내의 최초의 여성의원)

 

l        Nellie McClung (1873, ON ~ 1951, BC) Canada 여성 투표권 쟁취 운동, Alberta주의회 의원.

 

l        Irene Marryat Parlby (1868, England ~ 1965, AB) Alberta주 최초 여성 장관(=영연방국가 내 두번째 여성 장관), Alberta주 여성 농장 노동자 연합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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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분들이다! 잘 안 보이면 click 한 방이면 된다.

  

♡ 저기 저 산의 돌멩이 하나, 他山之石 ♡
 

오늘날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일도 알고 보면 처음부터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 무척 많다.

 

가끔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자면 여성과 남성,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이 난 듯한 논쟁이 많이 눈에 띄곤 한다. 읽다 보면 때로는 공감이 가는 경우도 많이 있고 나 자신도 언짢아 지는 경우도 많으나 상식적으로 행동한다면 여자다, 남자다 해서 서로 욕할 일도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남자건 여자건 욕 먹을 짓을 하는 사람이 욕을 먹게 마련이더라.)


게다가, 요즘 모국에서는 새 정부 출범을 앞 두고 여성가족부를 없애느니, 마느니 말들이 무척 많다. 없애거나 말거나 간에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평가 받는 그런 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여성가족부가 폐지되지 않는다 해도 역시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그 뜻이 숭고하더라도 그 뜻을 이루는 데 목소리만 크고 배타적으로 운동한다면 감정적으로도 일단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와 별 관계없는 서구의 옛날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이들 다섯 분 캐나다의 딸들은 목소리 높여 흥분하고 싸우지 않고 (목소리 크고 상대방을 조롱하는 싸움은 곧 감정적인 적을 양산해 낼 뿐, 설득력은 꽝이다.) 차분히 논리로 접근해 가면서 널리 지원군을 만들어 나갔기 때문에 그 옛날 고리타분하던 시절에도 여성의 문제를 여성들만의 문제 차원을 넘어 남성들이 적극 도와 줄 수 있게끔 유도하였다.

이 판례 덕분에 비로소 전 세계 사람들이 양성 평등의 필요성과 아울러 함께 더불어 사는 민주사회의 중요성을 깨치게 되었으니, 크거나 작거나 간에 결국은 대한 민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의 여성들은 이 다섯 분에게 고마운 빚을 지게 된 셈이다.

오늘 날, 대한민국의  여성 운동이 왜, 남성들에게서 크나 큰 반발을 받게 되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일부 극단적인 여성 인사들의 망언에 가까운, 자극적인 언사와 배타적인 태도가 한 몫을 차지하였다.

진정한 양성 평등의 구현을 위하여 일단계 전략으로서 여성 운동이 필요하다면, 쓸데없이 나라 지키는 군인들을 "집 지키는 개"라든지 하는 망언 따위로 남성들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든든한 동지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만, 오늘 날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들이 이 분들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좀 더 차분하고 즐겁게, 남녀 모두 다 함께 동참할 수 있는 양성 평등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를 바란다.

인간에는 여성과 그리고, 남성이 다 같이 포함된다. 여성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여성 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남편, 아버지, 아들, 사위가 모두 남성이기에 그렇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Ottawa를 가 본다. 연방국회의사당을 갈 때마다 ‘Famous Five’의 동상을 둘러 보고 오지만 우리 이쁜 따님께서는 아직 아무 생각이 없다. 우리 아이들은 여자라 해서 꿀릴 것이 없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니까. 성별에 따라 적성이나 취향 등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할 힘이 생긴다는 것만을 믿고 있다.

 

Famous Five의 동상 옆에서 뛰어 다니는 딸 아이를 보면서 나 자신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내 딸도 아들 못지 않게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찾고 동시에 책임도 함께 나누는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더 많은 자료를 원하시면
http://www.collectionscanada.ca/famous5/index-e.html


♡ 필자의 졸고 중 하나인, "♡ 여성가족부의 발전적 통폐합을 지지합니다."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656388 와 함께 읽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Posted by 핑크벨

  1. Favicon of http://axslayer.tistory.com BlogIcon Libertas 2008/01/01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구에서 앵글로-색슨족을 포함한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관념에서 여성은 재산, 즉 일종의 물건으로 취급됐죠. 켈트족도 마찬가지였구요. 오직 로마인들만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없이 당연스레 여겨지던 유럽인들의 이런 인식이 산업혁명을 통한 근대화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크게 고쳐지고 또 그렇게 시작된 물결이 전세계로 퍼지면서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도 여권에 대한 고정관념이 제고되고 많은 악습의 타파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캐나다의 이 다섯 명의 여걸들에 대해 우리나라 여성들이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을 것 같군요.

    • Favicon of http://canadastory.tistory.com BlogIcon 핑크벨 2008/01/02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내 딸아이가 이 사회에서 별 부담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남자건, 여자건, 백인이건 황인이건 간에, 우리 앞에 누군가가 먼저 무엇을 해 주었기에 고마운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 Favicon of http://xicc.egloos.com BlogIcon 신유 2008/01/13 2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대운하 이야기도 잘읽었습니다만 이번 이야기도 잘읽고갑니다. 완전한 평등은 아니더라도 표면적평등이 많이 이루어지게된것도 저런분들 덕택이군요. 물론 우리나라도 있겠지만요. 저런분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분이 많아서 공정하고 건강한평등이 많아져서 평등이란 주제로 고민하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 오길 기다려요 ㅎㅎ

    • Favicon of http://canadastory.tistory.com BlogIcon 핑크벨 2008/01/14 0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졸고를 여기 저기 읽어 주시니 고맙습니다. 딸과 아들을 함께 키우는 사람으로서 배타적인 여성운동이 아닌 함께 하는 양성평등 운동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3. Favicon of http://heomin61.tistory.com BlogIcon 푸른하늘 2008/01/15 0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서구에서 여자가 참정권을 가지게 된게 20세기 들어와서라는 건 알았고, 그 가운데 많은 논란이 있었다는 건 들었지만,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니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canadastory.tistory.com BlogIcon 핑크벨 2008/01/15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리 나라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타산지석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성부 하듯이 그렇게 하면 도대체가 정나미가 떨어져서 말이죠...그건 그렇고 저 역시 푸른하늘님에게서 좋은 정보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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