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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간 이야기

나이아가라 폭포 이야기 (3) 최초의 방문객

★ 나이아가라 폭포 세번째 이야기 - 최초의 방문객

▶ 나이아가라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과연 몇 명이나 관광을 올까?



우리 나라 관광지처럼 매표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정확한 통계를 잡기 어렵지만, 폭포 앞 주차장 매표소와 공원 구역 내 각 상점에서 모으는 통계 등을 근거로 하여 나이아가라 공원관리위원회가 집계하여 발표하는 통계 자료에 따르면, 한 해 평균 최소 1,300만 명 정도가 이 폭포 공원을 방문한다고 한다. 캐나다 전체의 인구가 이제 약 3,300만 명 정도라 하니 이 정도면 진짜 보물이라 할 만 하다.

 

온타리오주에 이렇게 엄청난 수익을 쏟아 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이 나이아가라 폭포에 내가 얼마를 쓰고 가는지는 알아도 몇 번째로 방문한 것인지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대개 그러하듯이 나한테는 영수증만이 남아 있지만, 처음 온 사람들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후세가 참고할 만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서구에 알려지게 된 것은 초기 북미 대륙 개척의 선봉자 Samuel de Champlain에 의해서다. 1604년 현재의 온타리오호를 탐험한 그는 원주민들에게서 나이아가라 폭포에 관한 풍문을 듣고 엄청나게 거대한 폭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 답사는 하지 못 한 상태에서 단지 원주민의 말을 인용하여 그 끝을 알 수 없고 땅과 닿은 곳을 볼 수가 없는 이 거대한 호수에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 한 큰 물이 쏟아지는 폭포가 있다더라…”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에 그쳤다.

사실, 그 당시 탐험가들의 보고서에는 "이랬다, 저랬다" 보다는 "~~~카더라" 가 더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 점,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 뒤를 이어 1678~1679년에 프랑스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북미 대륙 속 깊이 탐사를 하였던 Louis Hennepin 신부가 미시시피강의 원류를 찾아 온타리오호수와 이리호수의 경계 지역을 탐험하다가 드디어 풍문으로만 돌던 나이아가라 폭포를 최초로 직접 확인하였다.

이 때의 에피소드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있는 IMAX영화관에서 상영하는 IMAX 영화인
Niagara: Miracles, Myths, and Magic”에 자세히 나온다. (※ 고국에 계신 분들 중 혹시 나중에 나이아라가 폭포 관광을 가실 분들은 시간 내어 이 영화를 보시는 것도 괜찮다. 나이아가라의 역사와 지형, 여러 가지 모험에 대하여 재미있고 실감나게 보여준다. 나이아가라와는 관계 없으나, IMAX는 캐나다의 기술로 최초로 개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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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사진) 나이아가라 폭포를 최초로 발견한 Hennepin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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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사진) 신부 일행이 탐사 당시 사용하였다는 옛 지도













원주민에게 선교를 하기 위하여 다니던 Hennepin 신부 일행이 이리호수 근처로 오게 되었다. 지금이야 물론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당연히 이 부근은 밀림에 가까운 숲 속일 뿐이었다. 원주민을 찾다 지친 신부 일행이 캠프를 차리고 쉬던 중 저 멀리서 마치 천둥 소리와도 같이 우르릉 하는 소리가 계속적으로 들려옴을 알아 차렸다. 이 소리의 근원을 찾아 사흘을 헤메이다가 밀림 속에서 찾아 낸 것이 바로 이 나이아가라 폭포였던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 나라 사람은 누가 언제 최초로 왔을까?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처음 구경한 사람은 예상 외로 아주 오래 전에, 가까운 미국인들도 별로 관광 오지 못 하던 그 시절에 이 멀리까지 와서 관광을 하게 되었다.

 

1902, 나라의 운명이 일제에 의해 침탈당하던 암울한 그 당시에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께서 당시의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에드워드 7(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부)의 대관식을 경축하기 위해 축하사절단(단장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 포함 총 4)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이 처음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방문한 한국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사절단의 여정을 보면 우리들의 할아버지들께서 참으로 대단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사람일지라도 이 할아버지들의 기개를 따라 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분들은 광무황제의 황명을 받은 후 1902 47 인천항을 출항하였고 약 5주간 항해 끝에 태평양을 넘어 5 14일 캐나다 서부 항구인 빅토리아항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서구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이들 사절단 할아버지 일행은 뱅쿠버에서 바로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광활한 대륙을 건너셨다. 며칠 후 5 20일 토론토에 도착하였는데 그 날로 바로 다시 기차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로 가 그 곳에서 숙박을 한다.

 

이 분들은 다음 날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한 후 당일로 토론토로 귀환하여 수 일 후 몬트리올을 거쳐 퀘벡으로 가셨고 다시 그 곳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또 다시 갖은 고생을 겪은 후 런던에 도착하여 한 달간 공식 일정을 마친 후 조선으로 귀환할 때는 프랑스를 거쳐 유럽을 관통하고 스웨즈운하를 통과하여 인도양을 항해한 후 스리랑카, 홍콩을 거쳐 그 해 8 20일에 다시 인천항으로 귀환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06년 전인 1902년 그 옛날에 조선의 할아버지들께서 4개월 반 동안 세계일주 여행을 한 것이다.

이 분들, 당시 그렇게 멀리 외국여행도 해 본 경험도 별로 없었을 것이며, 달러나 파운드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영어도 시원치 않았을 텐데, 호텔 예약이나 제대로 하고 교통편이나 제대로 잡아 타고 다니셨을까? 상상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이 분들이 당시 여비로 4만원이라는 거금을 사용하였다는데 정작 영국에 도착해서는 에드워드 7세의 와병으로 인해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못 하였다 하여 혈세를 낭비하였다고 그 당시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한다. 그 분들은 괴로웠겠지만, 어쨌든 후손들로서는 덕분에 귀중한 자료를 하나 물려 받았다.

 

이 들 중 사절단의 부대표였던 이종응이, 일기를 쓰듯이 여행 기록을 작성하여 귀환 후 황제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기록이 바로 서사록(西)으로 현재 부천향토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것은 원래 순한문체로 쓰여져 있는데, 후손들이 알기 쉽도록 한글로 고쳐 쓴 것이 서유견문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이 분들이 당시의 서구문물을 본 소감과 현재의 느낌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든다. 잠시,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토론토와 나이아가라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셨는지 살펴 보자.

 

사절단(단장 의양군 이재각, 부단장 이종응, 번역 의경, 참리관 김조현)은 밴쿠버에서 대륙횡단철도를 6일간 타고 5 20일 토론토에 도착한 후 마차로 시내관광을 하였는데 고층빌딩이 즐비한 것을 보았다 하며 그 당시 토론토 인구가 22만이고 각급학교의 수는 수십 개라 헤아릴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 이 분들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도착 당일로 바로 기차에서 1박을 하며 나이아가라로 간다. (요즈음은 차로 1시간 반이면 간다.)

 

다음 날 네 분은 마차를 타고 폭포 구경을 하러 갔다. 이 분들이 보고 기록한 여행기에서 이 부분을 잠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이하 내용은 앞서 언급한 부천향토박물관에 보관 중인 서사록(西)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으며, 괄호 안의 註는 필자가 넣은 것입니다.)

 

여기부터 ▶▶▶

 

5 21(4. 14) 흐림

 

오전 7에 우리 네 사람은 마차를 타고 캐나다(美國界)의 장관인 나이애가라(馬蹄) 폭포로 갔다. 이곳은 바로 영국과 미국 두 나라의 경계지대로서 땅은 미국땅이지만 앞서 기술한 3대호수로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합류해서 이 폭포로 쏟아진다는 것이다. (; 나이아가라강 한 가운데가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인데, 이 분들이 방문한 곳은 캐나다 영토였지만, 아마도 당시 지리를 잘 몰라 착각했던 것 같다.)

 

물길의 원천지는 천여리이고 수세는 호대(浩大)하다. 이곳 물길은 좁고 양쪽 언덕 석벽의 넓이는 수십간에 지나지 아니하고 지형의 생김새가 말발굽 모양 같다 해서 폭포이름을 ‘마제(馬蹄)'라 일컫고 있다. (; 예스런 표현이 재미있다. 영어로도 Horseshoe falls라 부른다.)

 

석벽이 홀연히 깍아지른 듯 가파른 절벽이 백여장() 서 있었으니, 물길이 절벽에 걸린듯이 쏟아져 내려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하다. 물길의 기세가 서로 격돌해서 물빛은 혹은 푸르게 혹은 붉게 빛을 발해서 수 백개의 무지개가 걸린 듯하다. 폭포 아래 푸른 강물 위에는 흰 눈 같은 물보라가 공중에 가득하니 실로 천하 장관이다.

 

강 위에는 4-5개의 철교가 완연하게 걸쳐있는데 마치 긴 무지개가 물을 마시는 듯하다. 강 양쪽 언덕을 따라 철로가 있고 전차가 왕래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크고 작은 윤선을 타고 강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강 양쪽 도로에는 마차 행렬이 줄을 잇고 있어서 하루 유람객수가 수 천명이 될 것 같다. 강 남쪽 언덕에는 수 십층 높은 누각(樓閣)이 서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이 높은 누각에 올라 난간에 의지하여 내려다보니 공중에 흐릿한 기운(風烟)이 눈에 가득 차서 잠시나마 하늘 끝 만리 타국에 유람하는 고통을 잊게 했다. 이윽고 누각 주인이 상하 우의(雨具) 네 벌을 가지고 와서 입으라 한다. 우리는 그 뜻을 알지 못 하고 받아서 입었다. 주인이 앞장 서서 우리를 안내하여 강 언덕에 이르니 한 칸 철옥(鐵屋)이 있었다. 주인이 우리 일행에게 들어가기를 청하기에 들어갔더니 철옥 안에서 갑자기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고 철옥은 지하로 수 십길()을 내려가더니 멈추어 섰다.

 

  주인이 먼저 나가서 우리에게 나오라고 청하기에 나가보니 칠흑 같은 동굴이었다. 우리는 지하 동굴 가운데로 백여보 따라가다가 햇빛이 들어오는 곳을 바라보니 갑자기 머리 위에서 수 만개의 천둥 치는 굉음이 울리고 눈보라 같은 물보라가 어지러이 흩어져 사람의 이목을 깜짝 놀라게 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니 우리는 저 폭포수 석벽 아래에 서 있었다. 겁이 나서 우리는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곧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와 서로 마주보니 진흙탕에서 싸우던 짐승처럼 보였다. 대개 주인이 안내하던 길은 바로 폭포수 남쪽 언덕에서 굴을 파서 터널길을 만들어 폭포수로 통하게 한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의관을 정제하고 강을 따라 수 십보를 내려가니 사진관이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폭포수를 배경으로 앉아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돌아와서 기차를 타고 퀘벡항으로 돌아 왔다.

 

◀◀◀ 여기까지

 


▶ 폭포 뒤에서 Mornng shower를...


마제(馬蹄)폭포는 알겠는데, 누각 주인은 누구고 철옥(鐵屋)은 또 무엇인가? 철옥은 감옥이 아니라 폭포 뒤로 들어갈 수 있는 터널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말한다. 이 터널로 들어가는 투어가 바로 요 동네 온 사람은 누구나 다 한번씩은 들어 가보는 그 유명한 “Journey behind the falls”이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해 1902년에 이 엘리베이터가 처음 설치되어 가동되었다. 옛 분들이 그 당시의 어투로 표현하였지만 오늘 날에도 마음에 와 닫는 느낌! 그 것을 준다.

 

19세기 초만 해도 간간이 이루어지던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은 그저 멀리서 탄성만 지를 수 밖에 없었다. 폭포에 접근하기 어려워 답답해 하던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쓰러진 나무를 붙잡고 다소 위험하게 다가 가는 것 말고는 가까이서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1818년에 처음 폭포 옆 절벽에 계단과 전망대를 설치하였는데, 본격적인 개발의 필요성을 느낀 나이아가라 공원 관리위원회에서 이 계단을 허물고 수력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것이 188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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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 초기 Journey behond the Falls 전망대의 모습



폭포 뒤로 돌아 들어갈 수 있는 최초의 터널은 1889년에 건설되었다. 그 후 1902년에 전기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인 철옥(鐵屋)이 설치되어 우리들의 용감한 할아버지들께서 바로 이 것을 타실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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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ey behind the Falls, 터널에서 직진, 폭포 측면 전망대에서 본 Canadian Horseshoe Falls




요즈음도 변함없이 쫘~악 쫙 쏟아 지는 마제(馬蹄)폭포에 가면 이 분들 이후 나는 과연 몇 번째 방문객일까 한가롭게 생각해 보면서 한 편으로는 그 옛날 나라를 잃어 버릴 위급한 시절에 머나 먼 타국 땅으로 오셨던 그 분들의 까맣게 타 들어 갔을 속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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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작성할 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부천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의 일부를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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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하여 관심 있으신 분들은 요 아래.....먼저 지나 간 나이아가라 폭포 이야기 – (1), (2)”를 읽어 보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제 블로그 "파랑새 가족의 캐나다 이야기"에서는 저희 가족이 돌아 다니며 찾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명소들을 하나 둘 연속극으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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