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가 가끔 힘들어 할 때, 이런 저런 좋은 이야기를 들려 주곤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에게 위인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그 분들의 훌륭한 이야기를 마음 속 깊이 느끼고 그 분의 삶에서 무엇인가 배웠으면 하지만 아이들은 쉽게 내 마음을 알아 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시대가 요즈음 아이들의 삶과 많은 차이가 있고 가치관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KFC(Kentucky Fried Chicken) 매장 앞에 서 있는 흰 양복에 하얀 염소 수염을 기른 백발의 할아버지 커널 샌더스(Colonel H. Sanders:1890∼1980)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 주면 어떨까.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번 그 분의 인생을 배워 보자. 이왕이면 오랜만에 KFC에서 아빠가 닭고기 한 점 사 주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 주면 그 효과가 만점일 것이다. 일단 아이들이 KFC 앞에 서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라고 하면 호기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혹시 아는가. 내 아이 중에서 미래의 백만장자가 나올지.
▶ 일찍 찾아 온 불행
그가 6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기에 어린 시절 샌더스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당연히 무척 힘들었겠지만 그 덕분에 7살 나이에 요리를 곧잘 하게 되었으니 인간지사 새옹지마는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요즈음 아이들이 한참 깔깔대며 학교에 다닐 10살에 시작한 농장 일을 비롯하여 보험 외판원, 유람선 선원, 타이어 판매, 주유소 등 참으로 많은 일을 경험한 그는 22세 때 램프 제조업을 시작하였는데 그만 망해 버려 그나마 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하루 아침에 모두 날려 버린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실망하지 않고 또 열심히 일하여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게 되었는데 39세 때 발생한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견디지 못 하고 다시 전 재산을 날리게 되었다.
▶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다
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 켄터키 주 코빈이라는 곳에서 주유소 일을 하고 있었으나 불행은 그치지 않아 그만 아들을 잃고 만다. 거듭되는 불행에 낙담을 하고 있던 그 때 지나가는 손님이 무심코 던진 불평 소리가 귀에 들어 왔다. “도대체가 이 놈의 마을에는 제대로 된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이 말을 들은 그는 주유소 옆 창고에서 닭튀김 요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닭을 튀길 때 프라이팬을 사용했던 모양이나 그는 압력솥을 이용하여 속성 닭튀김 요리법을 개발하게 되었고 이 것을 주유소 손님들에게 판매 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이 주효하여 처음 매점처럼 시작한 이 사업은 점차 손님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결국 식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북미 주유소에는 편의점이 있지만, 옛날에는 그런 경영기법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분의 전략이 먹혀 들었던 측면도 있다. 특히나 시골 간은 곳에서는 주유소를 중심으로 편의 시설이 모여야 서로 장사가 잘 된다. 요즘도 역시 시골에 가면 주유소에서 간단한 식당을 함께 하는 업소가 많다.)
이 후 그의 닭튀김 요리를 맛 본 손님들의 입소문을 타고 승승장구하여 켄터키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당시 켄터키 주지사는 이를 기려 그에게 명예 대령(colonel)의 칭호를 내렸다. 이 대목에서 아, 이 할아버지가 옛날 사람이었구나 싶다. 영국 같았으면 아마도 기사 작위를 내리는 것처럼 아마도 그걸 흉내낸 것 모양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1939년에 이 잘 나가던 대령의 식당이 그만 불이 나서 전소하는 불행을 당해 거의 알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 포기하고 일찌감치 사회복지기관을 찾아 갈 만도 하건만 거듭되는 불행에 굴하지 않은 커널 샌더스는 여기 저기 돈을 모아서 조그마하게 다시 식당을 열었다.
그러나 이 것이 끝이 아니었으니 1950년대 초에 미국에 불어 닥친 불황의 여파로 인해 그의 식당은 다시 문을 닫고 결국 이제 환갑을 넘긴 그는 국가에서 받은 사회보장기금 단돈 105불을 가지고 그저 목숨만 부지하는 말 그대로 노숙자와도 같은 생활을 연명하게 된다.
보통 사람이 이 정도 상황까지 몰리게 되면 아마 제 정신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고통을 딛고 일어선 오뚜기 커널 샌더스도 이번만큼은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나이 환갑이 넘은 나이에 한 푼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재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 포기는 없다. 1009번의 노력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찬송가 소리를 듣고 커널 샌더스는 한참을 울며 기도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맑아짐을 느꼈다고 한다. 다시 기도를 열심히 하던 샌더스는 다시 닭고기를 만들어 보라는 영감을 얻게 되었다.
그 당시 목사들이 워낙 가난하여 쇠고기를 먹지 못 하고 값이 싼 닭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닭고기를 “목사고기”라고 불렀다 한다. 바로 그 때 2차 대전이 끝나 귀향하는 군인들 역시 값싼 “목사고기”를 사 먹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다시 용기를 얻은 커널 샌더스는 다시 압력솥과 양념통을 들고 인근 식당을 찾아 다니며 공짜 시식도 시키면서 재기를 꿈꾸게 된다.
그러나 아직 재기를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였던 그는 자신의 닭고기를 가지고 전국의 식당을 돌아 다니며 영업을 하게 되었는데 무려 1009번이나 퇴짜를 당했다 한다. 영업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1009번의 영업 시도란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엄청난 것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포기할 만 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털털이 차에서 잠을 자 가며 고생을 한 결과 드디어 기적 같은 일이 일어 났는데 드디어 어떤 사람이 샌더스의 닭고기 튀김 사업 제안에 “Yes”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드디어 남들은 은퇴를 하고도 남았을 나이인 74세가 된 1964년에는 미국과 캐나다를 통틀어 600 여 개 이상의 프랜차이즈로 대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대부분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자만에 빠지게 마련이다. 샌더스는 말년에 이르러 자기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재산을 모으게 되었지만 그 것이 자신의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고 재기할 힘을 얻었던 샌더스는 후에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과 선교 활동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게다가 재기에서 성공한 그는 회사가 본 궤도에 올라 더욱 더 욕심이 날 시점에 오히려 자신의 경영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나중에 켄터키 주지사가 된 존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자신보다 회사를 더욱 더 잘 경영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헐값으로 회사를 팔았고 그 자신은 KFC 회사의 월급쟁이로 일개 홍보일을 맡았다. 전문 경영인의 경영하에 KFC는 더욱 더 큰 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제 전세계에서 없는 곳이 없는 지구인의 KFC가 된 것이다.
사실 이 샌더스 할아버지의 불굴의 투지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 감사하는 마음 등은 아이들보다도 이민 생활에 지쳐갈 때가 많은 나 자신이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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