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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본 한국은

Lest We Forget - 11월 11일은 북미에서는 현충일

Lest We Forget

11월 11일, 북미에서는 ‘현충일’ (Remembrance Day)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드리는 날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

예전에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 아이에게 ‘11월 11일’이 무슨 날인지 아냐고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있게 대답했죠. “빼빼로데이잖아요!” 졸지에 ‘빼빼로데이’도 모르는 답답한 아저씨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에는 우리 어릴 때는 없던 벼라별 데이가 다 있죠. 빼빼로데이 역시 초콜렛을 묻힌 막대과자를 팔기 위한 과자 회사의 상술로 시작했지만 어쨌든 그 마케팅 아이디어는 참으로 대단해 보입니다. 덕분에 아이들은 답답한 아저씨는 저리 치우고 자기네들끼리 선물을 예쁘게 포장해서 주고 받으며 불경기에 그나마 과자 가게라도 살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우리 컨비니언스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캐나다에도 이 빼빼로 데이를 도입해야 합니다!!!

그러나 캐나다 사람들에게 ‘11월 11일’이란 고작 작대기 네개가 연이어 붙은 날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도 그러하지만 캐나다의 11월 11일은 작대기 과자 선물을 주고 받으며 즐기는 날이 아니라 그 반대로 엄숙하고 경건한 날, ‘Remembrance Day 현충일’입니다. 

‘Remembrance Day’ 유래와 추모식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죄악이라고도 볼 수 있는 전쟁은 당연히 피해야 할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해야 할 때는 후방이건 전방이건 모든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죠. 

제1차세계대전(1914-1918)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지만 캐나다 역시 참전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Remembrance Day’는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기해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상기하고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1919년 11월 7일 영국의 죠지5세가 제정했다고 하네요. 캐나다를 비롯한 영연방 제국에서는 오전 11시 2분간 묵념을 올리면서 전몰자들을 추모합니다. 

공식 추념행사는 오타와 연방국회의사당 앞의 현충탑(National War Memorial) 앞에서 연방국회의사당 평화의 탑(Peace Tower)의 편종을 울리면서 거행됩니다. 물론 연방에서만 기념하는 것은 아닙니다. 캐나다 전역에서 크고 작은 추념식과 노장들의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가슴에 단 빨간 양귀비꽃 Red Poppy

이맘때쯤이면 캐나다 사람이라면 대개가 가슴에 빨간 꽃을 달고 다닙니다. 플라자 곳곳에서 빨간 꽃을 약간의 정성만 드리고 받기도 합니다. 

1차대전은 탱크나 대포, 기관총 등의 대량 살상 무기를 본격적으로 전투에 사용한 전쟁이었습니다. 기관총을 쏘기 위해서도 기관총탄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도 참호 진지 구축은 필수적이었겠죠. 벨기에 플랜더스 전투에 참전했던 온타리오 주 구엘프(Guleph, 토론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즈넉한 동네) 출신 종군 의사 ‘John McCrae’는 진흙탕 참호 속에서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 젊은 군인들의 피에서 빨간 양귀비꽃이 피어난 것을 보고 종전 후 ‘In Flanders Fields’라는 시를 써서 헌시했습니다.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가슴에 다는 빨간 양귀비꽃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시(詩)가 있는 캐나다 지폐, 10달라

캐나다의 10달라 지폐 뒷면을 보면 오타와 현충탑이 보입니다. 그 옆에 서 있는 노병은 2차대전의 영웅 ‘Robert Metcalfe’입니다. 2007년 향년 90세로 돌아가신 이 분은 오타와 전쟁기념관에서 오랫동안 자원봉사를 해 왔고 재향군인들을 돌보는 사업을 해 왔습니다.

왼쪽 옆에 시 한수가 깨알같이 적혀 있습니다. (젊은이도 돋보기 없이는 절대 볼 수 없죠.) 이 시가 바로 ‘John McCrae’의 ‘In Flanders Fields’입니다. 돋보기 들고 시를 읽는 수고를 덜기 위해 제가 따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2011/11/11 - [팝송에서 시를 읊다] - 11월 11일에 낭송하는 시, ‘In Flanders Fields’

최소한 현충일 하루 만이라도 10달라 지폐에 낙서를 하거나 꾸기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Lest We Forget

일단 직역부터 하고 봅시다. ‘Lest’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하지 않게, in order to prevent something from happening’이라고 나옵니다. 학교에서 영어 배울 때 ‘lest ~ should ---‘라는 구문을 배웠을 겁니다. 이는 ‘~이 ---하지 않도록’ 뭐 이 정도로 해석하지요. 이게 일상 구어로 오면 ‘should’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위 문장은 ‘잊지 않도록 하자’는 말이겠지요. 나라를 지키다가 스러져간 그 분들의 충정을 잊지 않도록 하자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어릴 때 읽은 유명한 책 "The Jungle Book"의 작가 "Rudyard Kipling"의 시, ‘Recessional’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이 말은 현충일이면 특히 캐나다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평소에도 여기저기에 있는 현충로 표지판 등에도 써 있어 캐나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친숙한 글입니다. 예를 들어 토론토에서 캐나다 수도인 오타와로 갈 때 타고 가야 하는 고속도로인 ‘416’ 하이웨이 표지판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 국가의 수도로 들어갈 때 그리고 거기서 나올 때 항상 전몰장병들의 얼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의미겠지요.

한국전쟁에 참전한 캐나다

‘Remembrance Day’가 제1차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을 기리고 있지만 반드시 1차대전만 기리는 것은 아닙니다. 캐나다도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전쟁에 참여해 왔습니다. 멀리는 2차 Boer 전쟁(1899-1902)에서부터 1, 2차 대전, 그리고 최근의 아프간 전쟁에까지 이르죠. 그 중 우리와 가장 관련이 깊은 전쟁은 ‘6.25 한국전쟁’입니다.

캐나다는 한국이 어려움을 겪을 때 육해공 3군 모두 26,791명의 군인을 파병해 1,558명의 사상자(전사자 516명 포함)를 냈습니다. 인해전술로 내려오는 중공군을 가평에서 막아내 유엔군에게 반격할 시간을 벌어준 ‘가평전투(1951년 4월 22일-25일)’는 6.25 전쟁사에서 길이 남는 전투입니다. 이제는 노쇠해 백발이 성성한 참전용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Remembrance Day’ 퍼레이드를 하실 때 태극기도 등장하는 이유죠. 

미국은 워낙 전쟁을 많이 해서 그런지 현충일이 두 번이네요. 11월 11일 ‘Veteran’s Day’(재향군인의 날)와 5월 마지막 월요일 ‘Memorial Day’(현충일)가 그것입니다. 11월 11일은 캐나다 연방정부에서는 공식 휴일로 쉬지만 아쉽게도 제가 살고 있는 온타리오주에서는 공휴일이 아닙니다. 아, 이건 정말 시정해야 할 일입니다.

어쨌든 현재도 아프가니스탄에 많은 캐나다 젊은이들이 가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 전쟁이 과연 가치있는 전쟁이냐는 논란은 많이 있지만 지구촌의 한 국가가 내일 후손들의 평화를 위해 오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젊은이가 바치는 목숨에 살아 남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고마와하고 있는지에는 의심이 듭니다. 

해마다 11월 11일 오타와에서의 현충일 추모식이 끝날 무렵에는 현충탑 밑에 ‘Silver Cross Mother’ 한 분이 화환을 바칩니다. 이 ‘Silver Cross Mother’는 우리나라의 재향군인회와 비슷한 조직인 ‘Royal Canadian Legion’이 전쟁터에서 자녀를 잃어버린 어머니 중에서 한 분을 선정한 어머니 대표입니다.

‘John McCrae’의 시, ‘In Flanders Fields’ 해설은 여기를 보세요.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좋은 시입니다. 영어 공부도 곁들일 수 있습니다.

2011/11/11 - [팝송에서 시를 읊다] - 11월 11일에 낭송하는 시, ‘In Flanders Fields’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아래 글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11월 11일 '빼빼로 데이'라는 그 날에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저로서는 좀 어이없어 보이긴 하지만) '빼빼로'를 서로 나누면서 어쨌든 그 나이 때 또래 문화를 즐기는 아이들 문화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캐나다 국민도 아닌 한국인들이 굳이 외국의 현충일까지 찾아서 기념할 일도 없지만 저는 캐나다에 살고 있기 때문에 11월 11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날이구나...하는 점도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게 뭔 소리야 하지 마시고 그냥 그러려니 하시길…
 
2008/06/24 - [캐나다에서 본 한국은] - ♡ 캐나다에서 찾은 625의 흔적들 ♡

언젠가 우리 나라 학생들이 '6 25'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는데 저 역시 다행스럽게도 경험없는 세대에 속하지만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 그리고 참여할지도 모르는 군인들의 노고를 너무 몰라주고 그 세대들과의 괴리감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 11월 11일 '빼빼로 데이'는 아니지만, 캐나다의 현충일을 맞이해 보면 누구나 가슴에 빨간 양귀비꽃을 꽂고 다니는 등 직접 국토에서 전쟁을 치뤄 보지도 않은 캐나다가 오히려 전몰 장병들에게 진정으로 고마와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캐나다는 1812년 전쟁 말고는 국내에서 전쟁을 치뤄 본 적이 없는데도 이렇게 나 대신에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리고 있는데 비록 대부분 경험하지도 못 했다지만 불과 몇십년 전에 온 국토에서 전쟁을 겪었고 지금도 그 연장선 상에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왜 나라지키는 군인들을 '군바리'라는 등 우습게만 여기고 고맙게 여기며 존중하지 않는 걸까요??? 이런 이야기...내년 6월 25일 무렵이면 또 연례행사처럼 나오겠지요? 우리나라에서도 현충일이나 6 25 에는 무궁화 같은 걸 가슴에 꽂는 전통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은근히 이른바 네티즌들이 무서워서 미리 말하지만 전 보수층 노친네가 아닙니다. 그냥 보통 생각을 하는 보통 한국인이고 단지 조금 다른 점이란 한국에서 잠시 떠나 살고 있다는 것 뿐입니다.)

이 글은 토론토에서 발행하는 모 신문에도 게재했습니다. 대충 읽고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시는 토론토 동포 분이시라면 제가 원 저자이니 남의 신문사 글을 퍼 왔다고 나무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파랑새 가족의 캐나다 이야기

http://canadastory.tistory.com